로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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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1일 토요일 4면

고결한 생은 끝없는 메아리를 남긴다

한 평범한 녀인에 대한 감동깊은 추억중에서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나는 무엇을 바쳤는가라는 물음에 늘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애국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한 녀성의 사진앞에 서있다.이 땅에 너무도 소문없이 깊은 자욱을 남기고 지난해 여름 생을 마친 원산시 덕골동 주민이였던 문명실녀성,

생전에 언제한번 자기가 한 일을 그 누구에게 알아달라고 한적도 없고 자기 수첩에 그에 대하여 적어놓은 일도 없는 그였다.

하기에 그에게서는 하나의 공로메달도, 그 어떤 지원증서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인연을 맺었던, 그와 한식솔을 이루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들을수 있었다.남을 위해서는 그처럼 할 일도 많았던 녀인, 눈에 띄우는 모든것을 애국의 일감으로 삼았고 발길이 닿는 곳곳에 아낌없는 애국의 땀을 묻었던 한 녀인이 이 땅에 남긴 끝없는 생의 메아리를.


전쟁로병이 들려준 이야기


《그가 우리 집을 찾아온것은 2012년 7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전승절경축행사에 참가한 전쟁로병대표들과 사랑의 기념사진을 찍으신 소식이 신문과 방송으로 전해진 며칠후였습니다.

한 녀인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방안으로 들어서며 정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는것이 아니겠습니까.

〈로병아버지!〉

그리고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우리 전쟁로병들을 금은보화에도 비길수 없다고 하시며 높이 내세워주실 때 전쟁로병이였던 아버지가 생각나서 잠을 이룰수 없었다고,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도 다시 받고싶고 딸자식으로서의 도리도 다하고싶어 찾아왔다고 하는것이였습니다.쉰살이 넘은 녀인이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받고싶어 찾아왔다는 그 말이 저의 가슴을 크게 울려주었습니다.

그날로부터 나에겐 딸이 생겼고 의사가 생겼고 료리사가 생겼습니다.

그는 명절날, 생일날, 휴식일이면 어김없이 달려와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그저 몸보신에 좋은 보약과 맛좋은 식료품을 안고와서 우리 자식들에게 잘 돌봐달라고 부탁만 하고 가는 그런 걸음이 아니였습니다.

우리 집을 찾아오기 전에는 저의 자식들에게 아버지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가 알아보고 수산물을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물고기를 어떻게 료리해서 대접하는것을 더 좋아하는가, 아버지가 굳은 음식을 씹을수는 있는가 하나하나 속속들이 묻군 했습니다.그렇게 사전준비를 깐깐히 하고 내 식성에 꼭 맞는 음식, 내 체질에 맞는 보약과 건강식품을 들고와서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묻군 했습니다.

〈아버지, 이 딸이 해온 음식이 정말 맛있습니까?〉

맛있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가 얼마나 밝게 웃었는지 압니까.

한번은 그에게 힘들지 않은가고, 이런 걸음이 그렇게도 좋은가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람이 하고싶은 일을 할 때 그 기쁨이 바로 행복인것같습니다.〉라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전쟁로병들을 돌보는것을 그 무슨 의무로가 아니라 행복으로 여기는 녀인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난 그가 나 하나만이 아닌 우리 덕골동안의 10여명이 넘는 전쟁로병들의 가족을 찾아 바로 나에게 기울이듯 그런 깨끗한 지성을 바쳐간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길가에서 우리 전쟁로병들을 만나면 년로한 나이에 기온이 높은 곳에 오래 있으면 안된다고 하며 꼭 집까지 데리고가서 시원한 단물이라도 받쳐주고서야 마음을 놓던 녀인, 눈오는 겨울날이면 우정 집집의 전쟁로병들에게 전화를 걸어 길이 미끄러우니 될수록 밖에 나오지 말라고, 나올 일이 있다면 자기가 대신 갔다오겠다고 세심한 당부를 하고서야 마음을 놓던 녀인이 바로 그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훌륭한 녀인을 사람들앞에 내세우고싶어 한번은 그가 일하던 기관 일군들에게 편지를 쓰고있었습니다.그런데 그것을 알게 된 그가 그렇게 밝게 웃던 얼굴에 무거운 표정을 짓고 얼마나 안타깝게 말했는지 압니까.

〈내가 한 일은 모두 내 마음속에 기쁨으로 간직되였는데 자기를 위한 일을 하고 어디 가서 칭찬받는다는게 말이 됩니까.제발 저의 행복을 빼앗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전쟁로병들, 그가 돌봐준 특류영예군인들중 어느 한 사람도 그의 소행을 그 어디에도 알릴수가 없었습니다.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그토록 아끼고 귀중히 여기시는 우리 전쟁로병들을 위해 자기의 진정을 조금이나마 바쳐간다면 더 바랄것이 없다는것이 바로 그의 행복관이였습니다.》

이것은 덕골동 60인민반에 살고있는 리춘봉전쟁로병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늘도 덕골동에 살고있는 전쟁로병들모두가 문득 전화종소리가 울리고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때면 잊지 못할 문명실녀성의 모습을 떠올리군 한다고 한다.

그러면 《로병아버지-》 하고 정겹게 부르며 다가오던 그들모두의 친딸이 오늘도 살아있는것만 같다고 한다.


제대군인이 터친 진정


어제날 최전연국경초소 초병이였던 형제산구역건물관리소 로동자 김광현동무의 마음속에도 원산어머니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간직되여있다.

《2014년 어느날 내가 군사복무를 하던 중대에 원산에서 산다는 한 어머니가 보낸 원호물자와 수많은 나무모가 도착하였습니다.

거기에는 한통의 편지도 끼여있었는데 이런 내용이 담겨져있었습니다.

며칠전 TV화면에서 인민군부대들을 찾으시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의 모습을 뵈옵게 되였다고, 그 발걸음을 따라서는 심정으로 변변치는 않지만 자기의 성의를 담아 원호물자를 보낸다고 말입니다.

그때부터 그 원산어머니와 우리 중대 군인들사이에 혈연의 정이 맺어졌습니다.

문명실어머니가 늘 관심한 일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령도사적을 더욱 빛내이기 위한 사업이였습니다.어머니가 이곳에 심은 나무만 해도 정말 많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이런 일을 하면서 우리 마음속에 친근한 모습으로 자리잡았습니다.그 나날에는 우리들의 중대병실을 정든 고향집처럼 더욱 훌륭히 꾸리는데 필요한 각종 건재품들을 보내여온 날도 있고 애어린 신입병사들을 위해 체질에 맞게 성의껏 마련한 약재들을 보내주던 잊지 못할 날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초소 군인들의 어머니만이 아니였습니다.안변군 오계리일대의 피해복구현장에도,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건설장에도 달려가 군인들에게 힘과 용기를 안겨준 사람이 바로 우리 원산어머니였습니다.길을 가다가도 군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매 사람에게 꼭같이 차례지게 정성어린 원호물자를 마련해가지고와서 안겨주군 한 문명실어머니,

그는 말하군 하였습니다.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우리 병사들이 어머니라고 불러줄 때의 행복감을 자기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다고.》


산림감독원이 받은 충격


원산시산림경영소 칠림감독분소 산림감독원 김철동무가 전하는 이야기도 참으로 가슴뜨거운것이였다.

《어느날 한 어머니가 자기 아빠트주변 공지와 자기 동생의 집터밭에 씨앗을 묻어 자래웠다는 수백그루의 잣나무모를 안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어떻게 시내에서 이렇게 나무모를 키울 생각을 했는가고 묻는 나에게 어머니는 우리 원수님께서 산림복구문제로 걱정하고계시지 않는가, 이 나라 공민으로서 그이께서 걱정하시는 문제에서 애국의 일감을 찾는것은 응당한것이기에 이렇게 찾아왔다고 하는것이였습니다.년로한 나이에 나무모를 등에 지고 그렇게도 힘차게 앞장서 걷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가져온 나무모들을 풍토순화시키겠다고 하며 우리 칠림리의 산밑에 양묘장부터 꾸리고 아글타글 노력하였습니다.이렇게 2016년부터 매해 3정보이상의 산림을 조성하여 지난해까지 어머니가 푸르게 변모시킨 산림면적은 수십정보나 됩니다.

기록적인 무더위로 나무모들이 죽어가던 어느해 여름이였습니다.

산림감독원인 나도 맥을 놓고 주저앉았던 그때 어머니가 물지게를 만들어 등에 지고 나타났습니다.산등성이로부터 강기슭까지 어머니의 발자국이 끝없이 새겨졌습니다.왜서인지 그 모습을 보는 나의 마음속에는 이 칠림리의 산발에 새길이 나지고있다는 생각, 애국의 길이란 바로 이런것을 두고 하는 말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때부터 이 고장 사람들은 문명실어머니를 애국자어머니라고 부르고 어머니가 가꾼 산림을 가리켜 애국림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번은 내가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왜 꼭 이 칠림리에 나무를 심을 결심을 했는가고.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평양-원산관광도로에서 바라보니 이 산발이 마음에 걸려 내려가지 않더라고, 늘 우리 원수님 계시는 평양을 그리며 사는 강원도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앉은 공백인것같아서 그냥 바라만 볼수 없었다고.

문명실어머니는 바로 이런 녀인이였습니다.지난해 가을 어머니가 심은 잣나무들에 첫 잣송이가 달렸습니다.

첫 잣송이, 그것은 문명실어머니가 이 땅에 남기고간 애국의 열매였습니다.그 열매를 보며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오늘은 어머니의 자식들인 박문성동무와 박수정동무가 우리 칠림리의 산들을 더 푸르게 가꿔가기 위해 대를 이어 애국의 구슬땀을 바쳐가고있습니다.》

* *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친혈육의 정을 주고 이처럼 푸르른 조국의 산발에 애국의 넋을 고이 심고간 한 녀인의 인생을 더듬으며 우리의 가슴은 뜨겁게 젖어든다.

과연 무엇이 평범한 이 나라의 한 녀인을 값높은 애국의 길에 스스로 뛰여들게 하였고 그길에서 무한한 행복을 찾게 하였는가.

그가 마지막순간에 아들인 박문성동무에게 한 말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찾아본다.

《이 나라의 공민이라면 우리 원수님의 심중을 천만분의 하나라도 헤아리고 그이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바로 그래서였다.설사 그에게 훈장과 메달은 없어도 그의 인생이 그토록 값있고 그가 남긴 애국의 자욱이 우리들 매 사람의 가슴속에 이토록 크나큰 충격을 주는것은.

수령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애쓰고 당에서 바라는 일을 찾아하기 위해 노력하며 조국이 귀중히 내세우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깡그리 바치라.여기에 애국이 있고 우리 삶의 참된 의의가 있다.

바로 이것이 한 평범한 공민이였던 문명실녀성이 이 땅에 남긴 아름다운 생의 메아리이다.

리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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