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승강기운전공》, 그 부름을 되찾기까지
만약 그 누가 생활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때가 언제인가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하고싶다.주민들로부터 《우리 승강기운전공》이라고 불리울 때라고, 나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 더 크고 귀중한것은 한집안식솔과 같은 주민들의 밝은 웃음과 눈빛이라고.
처녀시절에 불리우던 그 소중한 부름을 되찾고싶어 한때 가정의 울타리속에서만 맴돌던 나는 다시 승강기운전공이 되였다.
《모든 사회성원들이 당과 혁명,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량심적으로 성실하게 살며 일해나가야 합니다.》
나는 사회생활의 첫 발자욱을 승강기운영사업소에서 내짚었다.
비록 들끓는 대고조건설장은 아니여도 당이 맡겨준 초소라고 생각하니 넓지 않은 승강기안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주민들의 생활상편의를 더 잘 보장할것인가를 늘 생각하며 승강기의 동작원리에 정통하기 위해 애썼고 승강기고장퇴치법까지 배우게 되였다.그 나날 나는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니였다.
퇴근시간도 미루어가며 밤늦게까지 승강기의 만가동을 보장하기 위해 애쓰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주민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가정에 기쁜 일이 있어도 나를 먼저 찾았고 내가 몸이 불편하여 입원치료를 받을 때에도 온 인민반사람들이 면회를 오군 하였다.
내가 담당한 아빠트의 주민들이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가 《우리 승강기운전공》이라고 정답게 불러줄 때면 나는 세상에 승강기운전공처럼 보람있는 직업은 없는것처럼 생각되였다.이런 내가 그처럼 정든 승강기를 내릴 결심을 품게 된것은 가정을 이룬 후였다.
승강기운전공에게는 단란한 가정생활을 할 시간적여유가 많지 못하다.남들이 하루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면 초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쉴새없이 주민들을 태우고 오르내려야 했고 지어 명절날이나 휴식일에조차 가정일을 뒤에 미루고 승강기의 만가동을 보장해야 했다.
연구사업으로 항상 출장이 잦은 남편과 태여날 때부터 건강이 시원치 않은 어린 딸자식을 돌보아야 하는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무거운 심리적부담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한지 2년만에 승강기운영사업소에서 나오게 되였다.그러면서도 제딴에는 가정일을 잘 돌보는것도 사회앞에 지닌 녀성의 도덕적의무가 아닌가고 자신을 위안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가정을 위해 뛰여다니기 시작했다.한해두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가정살림은 좀 윤택해졌지만 왜서인지 나는 생활의 진미를 느낄수 없었다.장사짐을 지고다닌 덕에 재산도 늘어나고 집안사람들로부터 《착실한 안해》, 《좋은 엄마》라는 부름도 들었지만 마음은 늘 허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거운 장사배낭을 지고 승강기앞에 서있던 나는 인민반사람들이 우리 아빠트를 담당한 승강기운전공이 고장난 승강기를 수리하기 위해 밤을 꼬박 밝혔다고 저저마다 칭찬하는 소리를 듣게 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 주민들로부터 《우리 승강기운전공》이라고 정답게 불리우던 처녀시절이 떠올랐다.이른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승강기에서 살다싶이 하면서 담당한 지구의 주민들과 한집안식솔처럼 가까와졌던 그때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구나 하는 생각이 집안에 들어서서도 좀처럼 사라질줄 몰랐다.
그때에야 나는 비로소 진정한 삶의 멋과 보람은 사회와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데 있다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나는 다시 승강기운영사업소에서 일하게 되였다.승강기의 만가동을 보장하기 위해 헌신하는 나날에 나는 주민들로부터 《우리 승강기운전공》으로 다시 불리우게 되였다.정다운 그 부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처녀시절로 되돌아간것만 같아 가슴이 부풀어오르군 한다.
아마도 내가 가정의 울타리안에서 그냥 맴돌았다면 어떻게 그렇듯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심어린 존경을 받을수 있겠는가.
지금도 승강기의 정상운영을 보장하고 밤늦게 퇴근길에 오를 때마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에 잠기군 한다.
참된 삶, 그것은 사회와 집단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삶이며 그렇게 살 때에만 인생의 더없는 희열과 보람을 느낄수 있다고.
관문승강기운영사업소 운전공 김련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