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의 한길에서 변치 않는 삶을 조국은 보석같이 빛내여준다
공화국영웅 홍영근동지에 대한 이야기
《의무감보다
2018년 9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공화국영웅홀에는 공화국영웅 홍영근동지의 사진과 투쟁공적이 새로 전시되였다.
강사로부터 그에 대한 해설을 듣는 참관자들은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이 우리의 빛나는 승리로 결속된 때로부터 45년만에, 평범한 인민반장으로 수십년간 일하다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15년후에 그에게 공화국영웅칭호가 수여되였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남다른 인생행로를 걸어 영생의 언덕에 오른 홍영근동지, 그는 어떤 사람이였고 어떤 공적을 세웠으며 그의 고결한 삶의 자욱자욱이 우리에게 남긴 생의 메아리는 과연 어떤것인가.
우리의 생명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평안북도 신의주시에서 살고있는 홍정수로인의 집에는 가보처럼 정히 보관되여있는 색날은 사진첩이 있다.
그 사진첩의 첫장에는 홍안의 모습으로 대좌의 견장을 달고있는 한 내무성(당시) 군관의 사진이 있다.그 군관이 바로 로인의
해방전의 철공소로동자를 새 조선의 보안서원으로, 당원으로 키워주시고 평양특별시(당시) 정치보위부장의 막중한 직무를 맡겨주신
하기에 그는 새 조국건설시기에는 물론 준엄한 전쟁시기에도 수도의 정치적안전을 책임졌다는 높은 자각을 안고 맡은 임무에 언제나 충실하였다.
홍영근동지는 대좌의 견장을 단 정치보위부장이였지만
1951년 4월이였다.
홍영근동지는 정방산부근에 둥지를 틀고있던 《반공동지회》의 원쑤놈들이 5.1절기념행사를 파탄시키기 위해 평양에 기여들었다는 자료를 입수하였다.
네놈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여러명과 함께 현지로 달려나간 홍영근동지는 주변지형을 주의깊게 살피다가 어느한 초가집에 숨어있는 놈들을 발견하였다.그는 주저없이 울바자를 박차고 뛰여들었다.
놈들은 완강히 저항하였다.적간첩두목놈이 마당으로 뛰쳐나오자 한 대원이 그놈을 덮쳤다.놈은 필사적으로 발악하다가 안전고리를 뽑은 수류탄을 꺼내들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홍영근동지는 수류탄을 쥔 그놈의 손목을 비틀어 놈의 배밑으로 꺾어 누르며 힘껏 깔아눕혔다.
순간 수류탄이 터지며 수많은 파편이 홍영근동지의 온몸에 들어박히고 그의 두손을 날려보냈다.
홍영근동지는 자기의 두손이 떨어져나간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한채 피흐르는 팔로 허리를 더듬으며 권총을 뽑으려고 했다.
바로 이때 다른 한놈이 또다시 수류탄을 들고 뛰여나왔다.위급한 정황속에서 그는 다시 몸을 날려 부상당한 두팔로 놈의 목을 그러안고 딩굴기 시작하였다.
전우들이 달려왔을 때 홍영근동지는 놈의 모가지를 꽉 그러안은채 의식을 잃고있었다.
한주일후 의식을 회복한 그는 동지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원쑤놈들을 다 잡았습니까?》
홍영근동지는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두손이 떨어져나간 육체적고통보다도
과연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듯 한몸 아낌없이 내대게 하였는가.
항일빨찌산들은 혁명의 사령부를 목숨으로 사수한 전투마다에서 지휘관과 대원이 따로없이 모두가 성새가 되고 방패가 되였다.그는 해방후 항일투사들로부터 그 모범을 삶과 투쟁의 좌우명으로 새기였던것이다.
《저는 오직
홍영근동지는 해방의 첫 기슭에서 다진 충성의 이 맹세를 실천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우리의 생명은
바로 여기에
그 이후 홍영근동지의 생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두손이 없어도 혁명은 끝까지 해야 한다
당의 신임으로 피현군에 위치한 영예군인제1통계부기학교(당시)에서 1952년 여름부터 교장으로 사업하던 그는 축포가 터져오르는 전승의 날도 그곳에서 맞이하였다.
3년간의 전쟁을 빛나는 승리로 결속한 전우들이 군화끈을 풀새없이 피로써 지킨 조국을 일떠세우기 위한 복구전역으로 용약 달려나가 땀을 동이채로 흘릴 때 격동된 그의 마음도 수도 평양으로 달리고있었다.
전쟁이 승리하였다고 하여 혁명이 끝났는가.
두손을 잃었다고 하여 복구건설에서 뒤전에 물러나야 하는가.
성한 몸이 아니여서 어제날의 전우들과 함께 다시 보위초소에 설수 없고 두손이 없어 벽돌 한장 제힘으로 쌓을수 없는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서운했다.
하지만 그는
영예군인학교의 교장, 그 직무를 그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학교의 모든 영예군인학생들이
조국의 서북변의 한 산골군에서 영예군인들의 정신적성장을 맡은 책임적인 혁명초소의 일군이 된 그는 이런 각오를 가지고
전쟁시기에는 물론 전후의 어려운 시기에도 당과 국가에 손을 내밀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영예군인학생들을 발동하여 학교주변에 염소와 돼지, 닭과 오리를 키우는 목장을 만들어놓고 자체로 부식물을 생산하여 보장하였고 가야금, 바이올린, 피리, 탁구채를 만들어주어 그들모두가 신심과 랑만에 넘쳐 생활하게 하였다.
그가 5년간 교장으로 사업하는 기간에 이룩한 공적에 대하여서는 력사에 불과 몇토막의 단편적인 사실로밖에 알려져있지 않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조국을 위한 투쟁도 중단하지 않은 그의 투철한 혁명적신념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당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은 영예군인들은 혁명의 꽃을 계속 피워야 한다고 하신
《나에게는 우리
그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든 오직
이런 전승세대가 바로 준엄한 전쟁을 이겼고 재더미우에서 전후복구건설의 우렁찬 동음을 울리며 내 조국땅에 전설속의 천리마가 나래치게 했다.이렇듯 훌륭한 혁명가, 애국자들이
그 세대를 대표하는 애국자들중의 한 사람으로서 홍영근동지는 조선로동당이 키워낸 첫세대 혁명전사의 혁명성이 어떤것인가를 자기의 신념과 원칙으로,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림없는 실천행동으로 증명했다.
목숨이 붙어있는한 두손이 없어도 혁명은 끝까지 해야 한다.직무가 높든낮든, 어느 위치에 세우든 나는 항상
이것이 홍영근동지의 투철한 인생관, 혁명관이였다.
전후 그가 변함없이 이어간 충성의 삶은
인민반장으로 수십년
홍영근동지가 세상을 떠난지 15년이 지난 1998년 6월 24일 그에게 공화국영웅칭호가 수여되였다.
《평안북도 신의주시 마전동 인민반장》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영웅증서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그가 걸어온 흔치 않은 인생길을 더듬어보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그처럼 어렵던 전후복구건설시기 남성인민반장은 그가 처음이였다.
근 30년간 인민반장으로 사업한 그가 전쟁시기에 대좌의 군사칭호를 지니고 평양특별시(당시) 정치보위부장으로 사업하였다는것과
그런 그가 인민반장으로 사업하게 된데는 어떤 사연이 있는가.
신의주시 마전동(당시)으로 이사한 홍영근동지는 1956년 여름에 동초급당위원으로 선거되였다.
동초급당일군과 이야기하는 과정에 인민반장사업이 무척 힘들다는것을 알게 된 홍영근동지는 서슴없이 자기에게 그 일을 맡겨달라고 제기하였다.
몸의 수십곳에 상처자리가 있고 두손을 잃은 영예군인전쟁로병인 그가 인민반장사업을 하겠다고 제기했을 때 동초급당일군은 몸도 불편한데 동초급당위원으로서 자기들을 잘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홍영근동지는 누구나 선뜻 맡아나서기 어려워하는 인민반장사업을 스스로 떠안았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직분은 많아도 인민반장이라는 말처럼 인민과 제일 가깝게, 제일 정겹게 이어진 부름은 흔치 않다.
하지만 그때의 인민반장사업은 오늘날의 인민반장사업과 대비조차 할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으나 인민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부족되는것이 너무도 많았다.
아직 반토굴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생활상곤난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고있었다.
주민들에 대한 사상교양사업도 지금처럼 진행되지 못하고있었고 복구건설의 노래가 곳곳마다에서 울려나오면서 새 생활이 약동하고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같지 않았다.
그가 인민반장이 되였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의수를 한 그를 측은한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설복해도 집단을 위한 일에 선뜻 몸을 적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영근동지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와도 언제나 기수가 되여 인민반원들과 동주민들을 이끌었다.
그에게 있어서 인민반장사업은 인민을 당의 두리에 하나로 묶어세우는 사업이였고 인민반을 충성과 애국으로 굳건한 일심의 대가정으로 꾸리는 혁명투쟁이였다.
인민반장인 그는 언제나 인민반원들과 동주민들을 당정책관철에로 이끌었다.전야에 더 많은 거름을 마련하여 보내줄 때에도 홍영근동지는 자신이 앞장서군 하였다.그 몸으로는 일을 못한다고 만류하는 동일군들에게 그는 전쟁시기에 부상당했다고 참호에 앉아있은 병사는 없었다고 하며 거름지게를 남먼저 지고 인민반원들을 이끌어갔다.
사람들은 그의 불굴의 모습에서 두팔을 잃고도 턱으로 중기의 압철을 누르던 조군실영웅과 수류탄을 입에 물고 적진으로 뛰여들던 강호영영웅을 다시 보는것만 같았다.
그의 며느리인 전명화동무는 시아버지가 불편한 몸이지만 매일같이 이른새벽에 남먼저 겨드랑이에 비자루를 끼고
홍영근동지는 그때 단순히 길만 깨끗이 쓴것이 아니였다.
사람들은 점차 그를 동정의 눈빛이 아니라 존경의 시선으로 보았고 영예군인인민반장처럼 순결하게 살고 그처럼 헌신적으로 일해나가기 위해 애썼다.
이렇게 홍영근동지는 여러개의 수류탄파편이 곳곳에 박혀있는 몸으로 인민반원들을 한사람같이 단합시켜 동적으로 제일 우수한 인민반으로 만들었다.
나라에서 강철증산을 호소할 때에는 인민반원들을 발동시켜 파철수집을 하고 알곡증산을 해야 한다고 하면 또 그들을 거름생산에로 불러일으키였다.때로는 동네아이들의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여 구수한 옛말도 들려주었고 마을녀인들이 가정사를 하소연하면 집집마다 찾아가 그 애로까지 풀어주며 온 인민반의 대소사를 다 맡아안고 화목을 도모하기 위해 애쓴 동네의 큰아버지가 바로 그였다.
그에 대하여 잘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가 인민반장일을 그만두고 전쟁로병으로서, 영예군인으로서 병치료에 힘을 넣고 국가의 혜택과 사회적우대를 받으며 여생을 편히 지냈더라면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정말 그랬더라면 그는 대좌의 견장을 단 군복을 입고 가슴에 영웅메달을 번쩍이며 성대하게 진행되는 전국로병대회에도 참가하는 영광을 지녔을수도 있다.
근 30년세월 궂은날, 마른날 가리지 않고 인민반사업에 헌신하던 그는 1983년 여름 동에서 진행되는 인민반장회의에 참가하였다가 전쟁시기에 입은 상처의 후과로 63살에 순직하였다.
눈을 감는 최후의 순간까지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로 불같이 산 그에게 당과 국가에서는 묻혀있던 전화의 나날의 공적까지 다 찾아내여 1998년 6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었다.
한생토록 변함없고 사심없이, 견실하고 대바르게 조국을 위해 헌신하며 후손들에게 애국적삶의 본보기를 가르쳐준 전승세대를 그처럼 높이 내세워주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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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렬한 전쟁시기만이 아니라 전후복구건설시기와 사회주의건설시기에도 그는 생의 순간순간을
그의 생의 매 구간중에서 어느 한 구간을 보아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참된 교본의 글줄이 빛발친다.
그에게 수여된 공화국영웅칭호는 단 한순간의 공백도 없이
어떤 사람이 영웅인가.이 물음에 조선로동당이 키운 첫세대 혁명전사인 홍영근동지가 고귀한 삶의 모범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명백한 대답을 주고있다.
이 땅의 새세대들이여,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바로 그들처럼 생의 시작부터 마감까지 오직
본사기자 백성근
김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