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옷도안가의 추억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하물며 저주로운 일본땅에서 태여나 갖은 민족적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온 생을 따스히 품어안아 키워주고 아름다운 희망을 꽃피워준 고마운 품에 대한 추억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오랜 조선옷도안가이며 공훈예술가, 교수, 박사인 리유미녀성의 추억이 바로 그러하다.

지난 50여년간 조선옷과 함께 흘러온 그의 삶은 누구나 체험할수 없는 남다른것이다.

태를 묻은 땅이여도 정든 고향이라 부를수 없는 차디찬 자본주의사회와 인생의 모든 영광을 안겨준 고마운 사회주의, 극적인 두 제도에서의 생활체험이 가져다주는 리유미녀성의 추억은 참으로 귀중한 진리를 우리에게 새겨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실생활을 통하여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야말로 자기들에게 문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마련해주는 가장 우월한 사회제도라는것을 확신하고있습니다.》

리유미녀성의 유년시절은 일본땅에서 흘러갔다.세월의 흐름을 거슬러 그 시절을 돌이켜볼 때면 그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작은 색동저고리를 떠올리군 한다.

하루는 그가 감옥살이를 하고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적이 있었다.딸을 한동안 대견하게 바라보던 아버지는 그의 두손을 꼭 잡고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배워주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을 높이 모신 조선사람이다.우리에게는 장군님께서 찾아주신 조국이 있다.》

우리는 조선사람!

아직은 그 말의 의미를 다는 알수 없는 나이였지만 그것은 이역의 나어린 동포소녀의 가슴속에 이 세상 가장 성스럽고 소중한 부름으로 깊이 새겨지게 되였다.

그때부터 소녀는 조선치마저고리를 남달리 사랑하게 되였고 늘 즐겨입군 하였다.

하지만 거치른 일본땅에서는 민족의 자랑인 치마저고리조차 마음대로 입을수 없었다.

일본반동들은 재일조선인녀성들이 입고다니는 조선치마저고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며 사정없이 칼질하는 망동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반동들의 민족적차별과 박해는 어머니가 밤새도록 지어준 자그마한 색동저고리를 눈물로 적셔놓군 했다.그토록 사랑하는 조선치마저고리를 마음껏 입고다닐수 없게 된 리유미녀성은 그것을 그림에라도 담고싶었다.

어릴적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10살도 채 되기 전에 《꼬마화가》로 소문이 났고 그것은 점차 조선옷도안가가 될 꿈으로 이어지게 되였다.하지만 민족배타주의로 쩌들대로 쩌든 저주로운 일본땅은 그의 소박한 소원마저 짓밟아놓았다.조선민족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깊이 뿌리내린 그곳에서 조선옷도안이라는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였다.

그는 조국이 그리웠다.아버지가 배워준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조용히 부르며 꿈에서도 바다건너 조국의 맑고 푸른 하늘을 그려보군 했다.

그러던 그에게 은혜로운 해빛이 따스히 비쳐들었다.

1960년 3월 리유미녀성의 온 가족이 어버이수령님께서 열어주신 귀국의 배길에 오르게 된것이였다.

조국의 품에 안긴 리유미녀성에게는 모든것이 놀라움이고 감격이였다.나라에서는 그의 가족에게 새 일터와 현대적인 살림집을 무상으로 주었고 자식들모두를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공부하도록 해주었으며 철따라 새 교복과 학용품을 안겨주었다.

일본땅에서는 바랄수조차 없었던 훌륭한 교육조건에서 조국이 안겨준 붓을 들고 그는 희망의 나래를 활짝 펼치였다.

그가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해 평양학생소년궁전에서 진행된 전국학생소년들의 미술작품전람회장을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그린 조선화 《예방주사》를 보아주시고 아주 잘 그렸다고 칭찬해주시면서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는 받아안은 영광과 행복이 꼭 꿈만 같았다.어버이수령님을 아버지로 높이 모신 사회주의조국에 대한 고마움으로 온밤 잠을 이룰수 없었다.

그후 어머니조국은 그를 평양미술대학에서 마음껏 배우도록 해주었고 대학졸업후에는 희망대로 교단에 세워주었다.

리유미녀성은 그때부터 조선옷과 다시 인연을 맺었다.

지난 수십년간 모든 사색과 열정을 조선치마저고리의 발전에 바쳐왔다.민족의 자랑인 조선치마저고리의 현대성을 살리면서도 우리 식에 맞는 독특한 형태와 색채, 장식을 탐구하기 위해 바쳐온 헌신의 무수한 낮과 밤을 어찌 한두마디로 다 이야기할수 있으랴.

그 나날 그는 민족의상발전에 참으로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고 여러권으로 된 《의상미술자료집》과 《조선민족의상》, 《계절옷》 등 20여권의 도서를 집필하였다.그리고 국내외에서 진행된 전시회, 발표회들에 수많은 의상도안작품들을 내놓음으로써 민족의 우수성을 널리 떨치는데 기여하였다.

이역땅에서는 소박한 꿈마저 이룰수 없었던 그였지만 어머니조국은 조선치마저고리를 비롯하여 민족의상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에게 공훈예술가, 교수, 박사의 값높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오늘 일흔고개를 훨씬 넘긴 리유미녀성은 조선옷과 함께 흘러온 자기의 삶을 긍지높이 추억하며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군 한다.

차디찬 이역의 하늘밑에서 설음과 불행에 울던 이름없는 한 소녀가 어머니조국의 품에 안기여 누구나 부러워하는 값높은 삶을 누리게 되였다고.

그렇다.사회제도와 인간의 운명은 하나로 련결되여있다.

한 조선옷도안가의 추억,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서도 사회주의조국의 품이야말로 운명도 미래도 다 맡아안아 보살펴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참된 삶의 품, 행복의 보금자리라는것을 다시금 가슴깊이 절감하게 된다.

본사기자 지성인


리유미녀성(가운데)

본사기자 정철훈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