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애국청년선구자

밀림속에 새겨가는 청춘의 자서전

량강도림업관리국 백암갱목생산사업소 로동자 김충복동무


《사업소적으로 운행조건이 제일 불리한 우리 작업소에서 운전사로 일하면서 충복동무는 계획수행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고있습니다.정말이지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하는 그를 보면서 감동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네일내일이 따로 없습니다.통나무를 실을 때까지 기다릴수 없다고 하면서 산판에 스스로 올라가 우리 벌목공들의 일손을 도와주는것이 이제는 습관으로 되였습니다.》…

이 꾸밈없는 말속에 량강도림업관리국 백암갱목생산사업소 양곡림산작업소 운전사 김충복동무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깃들어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사회주의강국건설의 앞장에서 돌격로를 열어나가는것은 당의 전투적후비대이며 우리 사회의 가장 활력있는 부대인 청년들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속에 떠받들리우고있지만 김충복동무에게도 자기 직업을 놓고 마음이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사실 그의 가문은 림업부문에서 오래동안 일해온 가정이였다.증조할아버지는 백암군에 조직된 한 림산사업소의 첫 당원들중의 한사람이였으며 할아버지도 산판에서 뼈를 굳힌 오랜 벌목공이였다.나라없던 그 세월 천대와 멸시만을 받으며 살아온 자기들을 나라의 주인으로, 천리마기수로 내세워준 당의 은덕에 대를 이어가며 보답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들은 자식들도 그길에 내세웠다.

허나 림산작업소에 갓 배치되였을 때 김충복동무의 얼굴빛은 밝지 못했다.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는것은 산뿐이고 들리는것은 기계톱소리뿐인 천고밀림에서 한생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하였던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웃에 위치하고있는 림산작업소에 이동작업을 나갔던 그는 그곳 벌목공들로부터 뜻밖의 인사를 받게 되였다.김충복동무가 전 림산작업소 소장의 손자라는것을 알고 누구나 기뻐하며 할아버지처럼 참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림산작업에 필요한 공구들까지 한가득 안겨주었던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우리는 동무의 할아버지에게서 일을 배우며 벌목공의 본분과 량심에 대해 알게 되였다고.

그날 밤 김충복동무는 오래도록 잠들수 없었다.

수십년이 지난 오늘도 할아버지가 사람들의 기억속에 그렇듯 깊이 남아있다는것이 무엇보다 놀라왔던것이다.단지 림산작업소 소장으로 사업하였기때문이겠는가.

아니였다.참인간의 모습은 쉬임없이 흐르는 세월도 지울수 없기때문이였다.

그제서야 김충복동무는 자기의 안일만을 위해 편안한 곳을 바라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것이며 그런 자신이야말로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가를 뼈아프게 뉘우치였다.

인간의 아름다움, 그것은 결코 거울에 비쳐진 미모에 있는것이 아니라 말없이 조국을 받드는 성실성과 열정에 있는것이다.솟구치는 꿈과 희망을 당이 부르는 어렵고 힘든 일터에 이어놓고 조국의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칠 때 청춘도 인생도 빛나는것이다.

김충복동무는 전세대처럼 뭇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깊은 밀림속에서도 공민의 깨끗한 량심을 바쳐가리라 굳게 마음다졌다.각오가 달라지니 일본새도 달라졌고 무슨 일감이든 다 자기가 해야 할 과업으로 여겨졌다.

용솟는 청춘의 힘과 열정을 통나무생산에 쏟아붓던 그는 한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였다.

아무리 나무를 많이 베여놓아도 운반능력이 미처 따라서지 못하다나니 능히 안아올수 있는 성과도 더 거두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당시 작업소에는 여러대의 화물자동차가 있었다.하지만 경사가 급하고 구배가 심한것으로 하여 운전사들은 누구나 선뜻 림산작업소에서 일하기를 꺼려했다.

그는 화물자동차운전사가 될것을 결심하였다.운전기술이 있어서도 아니였고 그 무슨 타산으로 내린 결심은 더더욱 아니였다.

더 많은 통나무를 생산하는데 필요한것이라면 그 어떤 위험한 일도 기꺼이 맡아야 한다는 높은 책임성과 자각성에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그때부터 그는 운전기술과 차수리방법을 직심스레 배워 얼마후부터는 자체로 화물자동차를 몰고 운재길에 나설수 있게 되였다.

그러는 김충복동무의 입에서는 늘 《압록강 2천리》의 노래소리가 떠날줄 몰랐다.험한 산길을 하루에도 왕복 수백리씩 달리느라 몹시 지치고 힘들었지만 자기가 나르는 통나무가 조국번영의 주추가 되고 인민의 웃음소리로 된다는 생각에 마음은 무등 즐겁기만 하였다.

이런 그였기에 자체로 부속품을 마련하며 무사고운행에 이바지하였고 하루계획을 남먼저 끝내면 스스로 다른 작업소의 통나무운반도 도와주군 했다.

어찌 그뿐이랴.새해를 하루 앞둔 깊은 밤 어느한 역에 화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작업소의 청년들을 불러일으켜 통나무를 실어주던 일이며 스스로 령길관리원이 되여 짬시간이면 불비한 개소들을 정리하고있는 사실들에서도 청춘시절을 값있게 빛내여가려는 그의 아름다운 지향을 안아볼수 있다.

오늘도 그는 당과 조국을 위해 많은 일을 할수만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다는 고결한 인생관을 지니고 깊은 밀림속에서 청춘의 자서전을 긍지높이 새겨가고있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김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