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개의 조선인민군입대증
보통강구역 락원동에서 살고있는 최영익동무의 가정에서
《조국보위는 공민의 의무이며 조국을 보위하는것보다 더 영예로운 일은 없습니다.》
보통강구역 락원동 6인민반에서 살고있는 최영익동무의 일가에는 19개의 조선인민군입대증이 있다.최영익동무와 동생들, 그들의 자식들이 인민군대에 입대하면서 받은것이다.현재 그들중 9명이 계급의 총대를 억세게 틀어쥐고 조국보위초소에 서있다.
며칠전 이 가정을 찾았던 우리에게 최영익동무는 19개의 조선인민군입대증에 깃든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의 어머니 김봉녀녀성은 해방전 망국노의 설음이 어떠하며 착취사회가 얼마나 사람 못살 세상인가를 피눈물속에 체험하였다.
집도 없고 땅도 없어 지주집에서 행랑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봉녀의 부모는 땅을 몇마지기라도 얻어부쳐 자식들에게 죽물이라도 배불리 먹여보려고 10여년세월을 머슴으로 살았다.그렇게 뼈빠지게 일했건만 그들은 끝내 소박한 소원마저 이루지 못하고 네 남매를 남겨둔채 숨지고말았다.
하여 맏딸인 봉녀는 어린 나이에 지주집을 뛰쳐나간 오빠를 대신하여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엄동설한에도 토스레로 만든 몽당치마를 걸칠수밖에 없었고 뼈도 굳기 전에 나어린 두 녀동생을 돌보며 고된 종살이에 시달린 그의 비참한 생활은 나라없던 세월 우리 인민의 불우한 운명과 암담한 처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속에서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그는 나라가 해방되여서야 비로소 인간의 참된 삶과 보람을 찾게 되였다.배움의 넓은 길을 열어준 해방덕으로 동생들과 함께 등교길에 올랐고 마을사람들이 지어준 집에서 네 남매가 모여 사람답게 살았다.
하지만 꿈같은 나날은 불과 5년, 행복과 기쁨만이 차넘치던 이 땅에 전쟁의 불구름이 밀려왔다.
귀중한 조국을 다시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오빠가 손에 총을 잡고 전선으로 달려나간 후 열다섯살 잡힌 봉녀는 어린 두 동생을 돌보며 전쟁의 시련을 이겨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두렵지도 외롭지도 않았다.세 자매의 곁에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부모를 대신하는 사랑과 정이 그들을 언제나 따뜻이 감싸안아주었고 적들의 폭격이 끊임없이 감행되는 속에서도 아이들을 위한 배움의 종소리는 어느 하루도 끊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오빠의 전사통지서가 전해졌다.
봉녀는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조국을 위해 목숨바친 오빠의 몫까지 합쳐 미제침략자들을 천백배로 복수하는 심정으로 전시생산과 전선원호사업에 언제나 앞장섰다.
이런 어머니의 슬하에서 최영익동무의 여섯 남매는 나라없던 세월 우리 인민이 겪어야 했던 피눈물나는 과거와 전선에서 돌아오지 못한 외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가슴에 새겨넣으며 자랐다.
그 나날 나서자란 조국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자기의 꿈과 희망이 깃들어있는 이 땅에 그것을 지켜 청춘도 생명도 아낌없이 바쳐싸운 전세대들의 붉은 피가 얼마나 진하게 스며있는가를 더욱 가슴깊이 절감한 최영익동무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남먼저 조국보위초소에 섰다.
그의 뒤를 이어 동생들모두가 차례로 손에 총을 잡았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최영익동무의 일가에는 조선인민군입대증이 더욱 늘어났다.
일흔을 가까이하고있는 최영익동무는 우리에게 어머니의 마지막당부가 조국을 굳건히 지키는 길에 가정의 행복도 미래도 있다는것을 명심하고 대를 이어 총대를 억세게 틀어잡아야 한다는것이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일가에는 입대증이 더 늘어날것입니다.》
우리는 입대증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증서가 아니였다.피줄로만이 아니라 넋으로 이어가는 계승의 발자취였고 조국수호의 길에 바쳐가는 긍지높은 삶의 뚜렷한 증서였다.우리 인민의 투철한 계급의식, 조국수호정신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 더욱 굳건히 계승되고있음을 19개의 조선인민군입대증이 그대로 말해주고있었다.
조국보위를 최대의 애국으로, 가장 신성한 의무로 여기는 이런 가정들이 많아 사회주의 우리 집이 그토록 굳건한것이다.
글 및 사진 본사기자 신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