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녀의사의 꿈

 

《오늘도 영란선생님이 맨 꼬리예요.》

근무성원의 바래움을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한영란은 진료소를 나섰다.나무잎냄새가 섞인 밤공기를 들이키며 거리에 나선 그는 굳어진 습관대로 인민문화궁전앞에 있는 전자시계에 시선을 돌렸다.

(벌써 22시로구나.)

그의 입가에서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이 새여나왔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환자에 대한 의료일군들의 정성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의 집중적표현입니다.》

중구역 신암종합진료소 의사 한영란, 주민들에 대한 건강관리와 치료사업으로 종일 뛰여다니는 그에게 있어서 퇴근이 늦어지는것은 례사로운 일이다.여든이 넘도록 집안일을 맡아하고있는 시어머니에게 늘 미안함을 안고있는 그였다.

집에 들어서자 정다운 목소리가 여느때처럼 그를 맞아주었다.

《이제야 오니? 배고프겠는데 얼른 밥부터 먹거라.》

《미안해요.어머니.》

퇴근해와서는 송구스러워 어쩔줄 모르는 며느리의 마음을 눅잦혀주려는듯 시어머니가 또 한마디 보탰다.

《난 진료소의사집이라는 말이 듣기 좋더라.》

코마루가 찡했다.그러나 다음순간 낮에 우연히 만났던 동창생의 모습이 떠올랐다.어느 한 중앙병원에서 근무하는 그가 하던 말이 귀전에 다시 울려왔다.

《너야 온 나라가 다 아는 유명한 의사가 되겠다는게 꿈이 아니였니.그런데 아직도 진료소에… 설마 자그마한 진료소에 너의 꿈을 영원히 묻어버린건 아니겠지?》

그 여운때문인지 몇술 뜨다만 밥상을 물리고 그는 방에 들어섰다.

책상을 마주하니 힘든줄 모르고 의학서적들을 하나하나 독파해나가던 청춘시절의 한영란이 사진속에서 마주보고있었다.

(나의 꿈이라…)

조용히 눈을 감으니 진료소와 함께 흘러온 20여년의 나날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에서 흘러갔다.

* *

지금으로부터 7년전이였다.

《환자를 제가 맡으면 안되겠습니까?》

《다시 생각해보는게 어때요? 좋은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라도 결과가 없으면 그땐…》

진료소일군들은 한영란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주민들에 대한 높은 책임감을 안고 늘 바쁘게 사는 그에게 의학적으로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나 다름없는 또 담당주민도 아닌 환자를 맡기는것이 마음에 걸렸던것이다.

하지만 그를 말릴수가 없었다.

정열가, 이악쟁이로 알려진 그가 손끝에 눈이 달렸다고 할 정도로 정맥주사를 척척 놓고 외과치료는 물론 고려치료도 잘하는것으로 인정받게 되기까지 바친 노력, 환자가 생기면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치료해주는 그의 남다른 품성앞에 그저 머리를 숙일뿐이였다.

언어장애는 물론 온몸의 감각조차 없는 환자에 대한 치료는 처음부터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려운 길이였다.그럴수록 한영란은 더욱 강심을 먹고 치료에 달라붙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잠도 미루어가며 심혼을 쏟던 그는 끝내 쓰러지고말았다.

《전 꼭 가야 해요.》

《하루 못 간다구 큰일 나겠소?》

남편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세운 그가 환자가 사는 서문동의 한 아빠트앞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집에 불이 꺼져있었다.

(날 얼마나 원망했을가.)

하는수 없이 걸음을 되돌렸지만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그래서 다음날 출근시간을 앞당겨 그의 집부터 찾았다.

《아무래도 끝을 볼수 없는 일인데 괜한 고생 하지 마세요.기대를 가져봤댔자 마음만 더 아플테니…》

하루사이에 눈이 퍽 꺼져들어간 한영란을 보다 못해 환자의 어머니가 한 말이였다.순간 한영란은 수백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가슴을 쿡 찌른듯 하였다.그앞에서 눈물을 보이기가 싫어 그는 뛰쳐나오듯 복도로 달려나왔다.

(내가 정말 괜한 고생을 하는것일가?)

문득 진료소에 배치받은 날 오랜 보건일군이였던 아버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의사의 긍지와 보람은 어떤 초소에 섰는가가 아니라 자기 직무에 얼마나 충실했는가에 따라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환자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그 한순간이 의사에게는 평생의 후회를 남기게 된다.…

눈물을 훔친 그는 다시 돌아섰다.

《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로부터 몇달후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훔칠 사이도 없이 치료에 열중하고있던 한영란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어-머-니!》라는 소리가 다시 울렸을 때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침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들은 환자의 목소리였다.환자의 시선은 분명 자기를 향하고있었다.한영란의 두볼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선생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환자의 어머니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요.사실 선생님마저 포기하면 어떻게 할가 두려웠어요.…》

한영란은 이 말이 그 어떤 인사보다도 더 고맙게 느껴졌다.

《제 걱정이 아무리 큰들 부모의 마음에야 비하겠습니까.》

그날 한영란은 의사들의 정성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였다.만약 그에게 환자를 친혈육처럼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심없는 사랑과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런 날은 오지 않았을것이다.

한영란의 의사생활은 이렇게 흘러갔다.

어느날 저녁 보통문동에서 살고있는 한 할머니의 치료를 마치고 자리에서 막 일어서던 그는 할머니가 헤여지기 서운해한다는것을 직감으로 느끼였다.혼자 살며 외로움을 타는 할머니를 두고 그는 차마 발걸음을 뗄수가 없었다.그래서 늦게까지 말동무를 해주었다.

《내 욕심만 차렸어.시어머니도 계신다는데… 빨리 집에 가보라구.》

로인의 말이 떨어져서야 한영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진료소로 돌아온 그가 퇴근준비를 서두르고있는데 다급한 전화종소리가 울리였다.전화내용이 무엇인지는 딱히 알수 없었으나 근무성원의 긴장한 눈빛을 보니 급한 환자가 생긴것이 분명했다.

《선생은 여길 지켜요.내가 가볼테니.》

구급소생치료를 마치고 환자가 안정상태에 이른것까지 확인하고 진료소로 돌아와보니 아침 6시였다.

그날 저녁 지친 기색이 완연한 그를 보며 남편이 한마디 했다.

《진료소에 의사가 당신 혼자요? 자기 몸도 돌볼줄 알아야지.》

지금껏 누구보다 안해를 리해해주고 떠밀어주던 남편의 마음을 모를리 없는 한영란은 그의 팔에 어리광부리듯 매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제곁에야 당신이 있지 않나요.》

* *

《들어서자바람으로 꼬꾸라지던 당신이 오늘은 웬일이요?》

남편의 목소리가 한영란을 추억속에서 흔들어깨웠다.한동안 말없이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정색해서 물었다.

《진료소에서는 정말 제 꿈을 이룰수 없을가요?》

안해에게서 동창생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했다.

《그 결정권이야 당신 마음속에 있지 않겠소.》

의미심장한 남편의 말을 되뇌이는 한영란의 머리속에는 산 화폭들이 장면을 바꾸며 흘러갔다.

제일먼저 떠오른것은 왕진가방을 메고 진료소를 나서면 《우리 영란선생이 오늘은 또 어디로 가나?》라고 인사를 보내던 동네로인들이였다.그뒤로 이제는 지팽이도 없이 자기 발로 걷는 서문동의 환자, 집에 들어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던 보통문동할머니의 모습이 엇갈렸다.또 그뒤로 셀수 없이 많은 주민들이 길가에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순간 한영란은 이름할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였다.

(그래.우리 지역 주민들이 모두 앓지 않고 건강해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면 난 더 바랄것이 없어.그것이 진짜 내 꿈이고 소원이야.)

다음날 한영란은 즐거운 기분으로 아침일찍 집을 나섰다.남편이 함께 걸으며 말했다.

《진료소로 곧장 가오?》

《아니요.먼저 들려볼데가 있어요.》

가슴속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이 하늘에 닿았는가 붉은 노을빛을 함뿍 안고 걸음을 재촉하는 한영란의 가슴에는 형언할수 없는 삶의 희열이 넘쳐흘렀다.

본사기자 조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