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다 부강조국을 떠받드는 성돌이 되고 뿌리가 되자

교육자가정의 긍지

삼지연군 무봉고급중학교 교장 지찬옥동무와 그의 가정

 

하늘아래 첫 동네로 불리우는 삼지연군 무봉마을에는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교육자가정이 있다.무봉고급중학교 교장 지찬옥동무의 가정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 우리의 당원들과 근로자들속에는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묵묵히 자기가 맡은 초소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0여년전 대학을 졸업하고 혜산시의 어느 한 중학교교단에 섰던 지찬옥동무가 가정을 이룬 후 남편이 교편을 잡고있는 삼지연군 무봉마을의 자그마한 산골학교로 갈 결심을 내리게 된것은 결코 일시적인 흥분이나 충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오늘도 그의 가슴속에는 사범대학입학통지서를 가슴에 품고 집에 들어선 날 전쟁로병인 아버지가 눈물을 머금고 하던 말이 소중히 간직되여있다.

《어릴적부터 교단에 서고싶어하던 너의 소망을 나라에서 헤아려주었구나.부디 공부를 잘해서 받아안은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참된 인간이 되거라.》

대학에서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던 나날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의 길에 오른 지찬옥동무의 마음은 저도모르게 혁명의 성산 백두산이 자리잡고있는 삼지연군으로 향하게 되였다.

(우리 당의 혁명전통이 뿌리내린 백두산이 자리잡고있는 곳, 그곳에서 아이들을 배워줄수는 없을가.)

그 마음이 자라 백두산기슭의 자그마한 산골학교교단에 주저없이 서게 되였던것이다.

나서자란 혜산시를 떠나 새로운 초소에 서던 날 그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불멸의 혁명사적이 깃들어있는 영광의 고장에서 사는 아이들을 지덕체를 겸비한 미래의 역군으로 훌륭히 키울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

학생들을 친자식마냥 품어안고 그는 후대교육사업에 진정을 바쳐갔다.

그러나 결심을 실천에 옮긴다는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고난의 시기 철부지 어린 딸자식들앞에 풀죽그릇을 내놓고 학교로 떠날 때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그러나 하루수업을 마치고 헤여질 때면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정답게 인사하는 학생들의 맑은 눈동자마다에 삶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모습만을 새겨주고싶었다.

그는 백두산기슭에 자리잡은 학교의 교원이라는 자각을 안고 남편과 함께 비록 때식은 번질지언정 교단을 단 하루도 비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뜻밖에도 영광의 시각을 맞이하게 되였다.

꿈결에도 뵙고싶던 위대한 장군님께서 무봉마을의 자그마한 산골학교에 찾아오시였던것이다.

그날 자기가 수업하는 교실에도 들리시여 친어버이의 심정으로 교수참관도 하시고 남편과 함께 교단을 지켜가고있는 그의 수고도 헤아려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르며 지찬옥동무는 흐르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교원들은 나라의 흥망과 관련한 중요한 교육사업을 맡은 혁명가라는 높은 긍지와 책임감을 안고 모든 학생들을 지덕체를 갖춘 우리 혁명의 후비대로 억세게 키워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현지교시를 가슴깊이 새겨안으며 지찬옥동무는 자신에 대한 요구성을 더욱 높이였다.

자기가 맡은 학생모두를 학습과 도덕품성, 체육을 비롯한 모든 측면에서 도시학교학생들 못지 않게 키우는것, 이것은 지찬옥동무가 품은 지향이고 목표였다.

이런 마음으로 후대교육사업에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쳐가던 나날 지찬옥동무는 우리 나라의 첫 10월8일모범교수자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고 수도 평양에서 진행된 뜻깊은 대회들에 참가하여 위대한 장군님과 경애하는 원수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영광을 지니였다.

학교교장으로 사업하는 그 바쁜 속에서도 지찬옥동무는 딸자식들도 훌륭히 키워 부모가 서있는 산골학교의 교원들로 내세웠다.

오늘도 남편과 함께 자식들의 앞장에서 후대교육사업에 깨끗한 량심을 바쳐가고있는 지찬옥동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군 한다.

교원들을 직업적혁명가로 내세워주고 값높은 삶을 빛내여주는 우리 당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충정으로 보답하는 그 길에 우리 가정의 긍지가 있고 행복이 있다고.

글 및 사진 본사기자 리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