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력갱생으로 승리떨쳐온 력사를 돌이켜보며

전시식량증산은 전승을 안아오기 위한 결사전이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식량을 생산하기 위한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며 전선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1951년에 들어서면서 전쟁은 더욱더 격렬해지고 장기화되여갔다.

조성된 정세는 장기전에 대처하여 전선과 후방의 수요를 보장하기 위한 전시생산을 더욱 강화할것을 요구하였다.특히 전시식량생산이 중요한 문제로 나섰다.

전선과 후방의 모든 중하를 한몸에 지니시고 전쟁을 승리에로 이끌어나가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0(1951)년 봄 몸소 평안남도안의 여러 농촌을 찾으시여 농민들을 전시식량생산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높이 받들고 온 나라 농민들은 식량증산을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일떠섰다.

당시 농촌의 실태는 매우 어려웠다.원쑤들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우리 농민들에게서 소와 종곡을 닥치는대로 략탈하였으며 농기구들을 대량적으로 파괴하였다.또한 열성농민들과 그 가족들을 야수적방법으로 학살하여 사실상 우리 농촌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농촌에 남은 사람들이라야 후퇴했다가 돌아온 중년이상의 남자들과 학생들, 로인들, 녀성들이였다.

개천면 중흥리(당시)라고 례외로 되지 않았다.

부락마다에는 10여채의 살림집이 있었지만 실지 일할 사람들은 한 집에 1명도 되나마나하였다.하루하루 봄파종시기는 다가오지만 농기구와 부림소도 얼마 안되였고 종곡도 모자랐다.더우기 어려운것은 보탑을 잡을 남정로력이 없는것이였다.그러나 마을의 녀인들은 모든것이 부족하다고 가만히 앉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소겨리반과 품앗이반을 조직하여 서로 돕고 이끌며 봄갈이에 떨쳐나섰다.

단발머리처녀인 김락희동무가 첫 녀성보잡이로 나섰다.

사랑하는 동생을 총창으로 찔러죽인 원쑤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보잡이로 나선 그는 적들의 대갈통을 박살내는 심정으로 밭갈이를 하였다.

무게가 쌀 두말과 맞먹는다는 무거운 연장을 소잔등에 메우고 밭을 갈다 중심을 못 잡아 엎어진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가 쓰러지면 땅을 묵이게 되고 그러면 싸우는 전선에 쌀을 보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를 일으켜세웠다.

남정들도 하기 힘들다는 밭갈이를 녀성이 한다는것자체가 그때까지 우리 농촌에서 있어본적이 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만 계시면 우리는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굳센 신념이 그를 녀성보잡이명수로 자라나게 하였다.

주체40(1951)년 11월 22일부 《로동신문》은 김락희동무의 투쟁에 대하여 이렇게 전하였다.

《…그는 온갖 열성을 다하여 논밭기경방법을 배우기에 힘썼다.그리하여 불과 10일이내에 쌍겨리를 다룰수 있는 요령과 힘을 길러냈다.

그는 만만한 자신을 가지고 3월 10일에 리녀맹에서 조직한 기경전습회에서 다른 능숙한 보잡이들과 같이 녀성들을 지도하였다.

이날 전습회에 참가한 많은 녀성들은 〈공부만 하던 락희가 논밭을 가는데 우리라고 못하겠는가!〉라고 하며 저마다 팔을 걷고나서게 되였다.

리내 녀성들에게 기경방법을 습득시키기 위한 김락희동무의 노력은 실로 컸었다.

그의 참을성있고 강의한 투쟁에 의하여 마침내 리내에서는 40여명의 녀성보잡이를 길러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처녀가 보잡이로 나섰다는 소문이 한입두입 건너 이 마을, 저 마을에 퍼져 삽시에 대중적인 녀성보잡이운동으로 번져갔다.

이웃마을의 한 녀성이 보잡이로 나설것을 결심하고 연장을 메우던 때였다.

황소도 자기를 길들이는 사람이 녀성이라는것을 알아서인지 자주 받기내기를 하였다.

그는 소를 꼭 길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늙은이들의 말대로 명주끈에 잔자갈과 못을 여러개 묶어 회초리를 만들어 소를 길들이였다.제멋대로 놀 때마다 한번씩 안겨지는 회초리맛을 본 황소는 며칠 못 가서 길들여졌다.

그전같으면 얌전하게 남자들의 뒤시중이나 들어주던 녀성들이 이렇게 농사의 주인이 되여 농촌을 지켜싸웠다.

부락마다 녀성보잡이명수들이 속속 나왔고 제 집 밭갈이만이 아니라 마을의 모든 논밭을 다 갈아엎는 서로 돕고 이끄는 기풍이 발휘되였다.

적기의 맹폭격속에서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논과 밭을 갈았다.말그대로 후방도 전선이였다.

원쑤들의 폭격에 밭갈이를 하다가 쓰러진 녀성들도 있었다.피투성이가 되여 쓰러져 숨을 거두면서도 밭갈이를 부탁하며 간 동무들의 몫까지 합쳐 더 많은 밭을 갈자고 녀성들모두가 떨쳐나섰다.

그들은 원쑤들의 폭격이 너무 심해 밤부터 새벽까지 밭갈이를 하였다.

놈들의 폭격으로 하루에 500평밖에 밭을 갈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억척같이 일떠선 녀성들은 농사일을 멈추지 않았다.

풀죽을 먹으면서도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고 한치의 땅도 묵이지 않고 밭을 갈고 씨앗을 묻었다.

오직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모두가 벌에서 살며 일했다.

룡천군 장산리의 녀성들도 보잡이가 되여 밭을 갈았다.가증스러운 적기들의 폭격은 고요한 농촌의 정적을 깨뜨리며 씨앗을 묻은 땅을 사정없이 파헤쳤고 귀뿌리를 스치는 기총탄은 그들의 생명을 시시각각 위협하였다.

그러한 속에서도 녀성들은 원쑤들에 대한 치솟는 증오로 복수의 피를 끓이며 소잔등과 몸에 위장을 하고 달밤에도 논과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녀성보잡이운동을 확대하기 위하여 보잡이강습을 조직하도록 하시고 이 운동선구자들의 좋은 경험을 일반화하는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도(당시)에서만도 1951년 한해동안에 무려 1만 수천명의 녀성보잡이가 나왔다.

농촌들에서 녀성보잡이운동이 대중적으로 벌어짐으로써 제철에 논밭갈이를 보장하여 한치의 땅도 묵이지 말라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는 빛나게 관철되였다.

참으로 후방의 녀성농민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안고 전쟁승리의 그날까지 모든것을 다 바쳐 굴함없이 싸웠고 밤을 지새우며 낟알을 정성껏 찧어 싸우는 고지에 보내주었다.

온 나라 후방의 녀성농민들이 영웅적으로 벌린 전시식량증산투쟁은 인민군용사들을 원쑤격멸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였으며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앞당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본사기자 김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