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대 당원들은 이렇게 투쟁하였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상반년기간에 년간계획 완수,

이것은 함남도자동차사업소(당시) 3046호자동차운전사 로력영웅 김영련동무가 해마다 이룩한 성과이다.

1965년 어느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먼 광산에 기계부속품을 실어다주고 돌아온 어느날 저녁 그는 차를 정비한 다음 다시 발동을 걸었다.

발동소리를 듣고 달려나온 사업소사령이 동무의 임무는 끝났으니 집에 들어가 푹 쉬라고 등을 떠밀었다.그러면서 수백리 떨어진 대흥이나 요덕으로 갈 물동밖에 계약된것이 없다고 덧붙였다.이렇게 말하면 김영련동무가 스스로 물동수송을 단념하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김영련동무는 혁명과업을 다 수행하지 못하고는 잠자리에 누울 권리가 없다고 하면서 자기자신에게 타이르기라도 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동무나 나나 우리는 다 당원이요.당원이 어찌 당의 지령인 계획을 마음대로 어기겠소.우리에게는 오직 그 계획을 무조건 끝까지 수행해야 할 의무만 있을뿐이요.》

그는 곧 길을 떠났다.

그날 늦은 밤 사령은 대흥에서 온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3046호가 수송계획을 140% 수행하였다는 김영련동무의 보고였다.

이처럼 당원이라는 부름을 소중히 여긴 그였기에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운행길을 이어갈수 있었다.

 

《창의고안 1인 1건》운동

 

천리마대고조시기 강선제강소 제1조강직장 당원들속에서 있은 일이다.

당중앙위원회 12월전원회의 결정을 높이 받들고 분연히 일떠선 이들은 년초의 증산목표외에 6 250t의 강재를 더 생산할것을 결의하여나섰다.

보수주의와 소극성에 사로잡힌 일부 일군들이 야단을 쳤다.

년초 증산목표 3 000t도 힘든 과제인데 계획만 잔뜩 높여놓으면 곤난하다, 설비의 증설이 없는 이상 책임을 질수 없다, 하지도 못할것을 가지고 떠들기만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물러설 당원들이 아니였다.진지한 모색속에 착상이 나왔다.

롤교체시간을 절반 단축시키는 등 합리적인 대책을 세우면 여기에서만도 2 500t을 더 생산할수 있다는것이였다.

너도나도 지혜를 합치는 속에서 《창의고안 1인 1건》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전 직장에 파급되여 300명의 로동자들속에서 230여건의 창발적의견들이 제기되였다.

이것은 전반적압연강재의 시간당생산량을 7.6t으로부터 9.7t으로 장성하게 하였다.전해에 비하여 거의 2배로 장성된 1957년도계획은 126.2%로 초과완수되였다.

 

당에서 바라는 일만 할수 있다면

 

당이 준 명령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무조건 결사관철한 전세대 당원들중에는 어느 한 탄광 소대장 김규현동무도 있었다.그는 침수된 갱들을 자진하여 맡아 복구한 훌륭한 당원이였다.

어느 한 갱의 복구에서는 지압이 센것이 난문제로 제기되고있었다.

조금만 굴진해 들어가도 높은 지압으로 하여 동발이 견디지 못하였던것이다.

고심끝에 그는 갱의 지압상태에 대응한 새로운 방법을 내놓았다.

하지만 일부 일군들은 그것이 기술적으로 담보할수 없는 방법인데다가 그대로 하면 굴진실적이 낮아진다는것으로 하여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물러설수 없었다.

지압때문에 반복공사를 하며 자재와 로력이 헛되이 소모되고있는 현실을 한시도 묵새길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는 대중과 토의해가며 자기의 방법을 기술적으로 더욱 완성시키였고 그 실현에 동요하는 소극적인 현상들과도 완강하게 투쟁하였다.어떤 때에는 사람들로부터 공명심에 들떠있다는 말까지 듣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누가 어떻게 말하든 당에서 바라는 일만 할수 있다면 뼈가 부서져 가루로 되는한이 있더라도 기어코 해내리라는 결심을 안고 달라붙었다.

그리하여 1962년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그를 선두로 한 14명의 영구화소대원들은 644m의 갱을 굴진포장하였으며 766㎥의 갱목을 절약하여 국가에 많은 리익을 주었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