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도 늦출수 없고 한순간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 반제계급교양이다

가슴쓰라린 수난의 자욱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우리 녀성들은 삶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히며 마소처럼 취급당하였다.

평양종합방직공장(당시)에서 일하던 고영숙녀성의 해방전 생활이 이에 대해 말해주고있다.

그가 16살 나던 해의 여름 어느날 그의 아버지는 품팔이를 떠나게 되였다.올망졸망한 다섯남매를 어떻게 하나 먹여살려보려고 뼈빠지게 일했으나 나날이 더욱 쪼들리기만 하는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던것이다.

고영숙도 남의 집 아이보개로 이집저집 돌아다녔지만 동생들에게 죽 한끼도 먹이기 힘들었다.

처녀꼴이 잡힐 나이가 될 때까지 그는 글 한자 배우지 못하였다.

굶주림에 나날이 시들어가는 동생들을 눈뜨고 볼수 없었던 고영숙은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방직공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었기때문이였다.

그는 같은 또래의 처녀들과 같이 북행렬차에 올랐다.어느 한 방직공장에 가면 벌이가 좋다는 왜놈의 꾀임수에 넘어간 고영숙은 그때까지도 자기가 이미 팔리운 몸이 되였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담장을 성벽처럼 둘러친 방직공장에서 고역살이를 하는 괴로운 나날이 흘렀다.매일 16~18시간의 고된 로동에 시달리면서도 보잘것없는 품삯마저 식비로 바치기때문에 손에 쥐여볼수 없었다.하루일이 끝나도 공장밖에 나갈수 없었다.

말이 공장이지 인간의 피를 짜내는 감옥이였다.끼니마다 주는것도 구유같은 나무통에 담아주는 소금물에 버무린 통강냉이 한줌이였다.

어느날 주린 창자를 그러안고 천을 짜던 고영숙은 현기증에 쓰러지면서 직포기의 피대에 말려들어갔다.

헌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였으나 감독놈들에 의해 그가 내던져진 곳은 병원이 아니라 외진 창고의 차디찬 콩크리트바닥이였다.며칠동안 생사기로에서 헤매이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참을래야 참을수 없었던 그는 함께 팔려온 처녀들과 같이 일본감독놈에게 항거해나섰다.그러나 그들에게 차례진것은 가혹한 탄압과 더욱 고된 로동뿐이였다.

죽지 못해 살아가던 그는 조국이 해방된 후에야 인간의 참된 삶을 누릴수 있었다.

본사기자 김승걸